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부부백수 >나의 회사이야기

by 리치_자몽 2022. 5. 25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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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일본어를 전공했다 .
그리고 당연히 취직은 일본어 관련 업무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.
대학교에 들어가 처음 접하게 된 일본어는 사실 하고싶어서라기 보다는 우스운 이유로 얼떨결에 배우게 되었다 . 그전엔 일본에 관심조차 없었고 오히려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만 있었다 .
그러던 내가 히라가나 카타카나를 겨우 외우게 되고
학부제로 입학했다가 전공까지 일본어를 선택했다 . 일본이라는 나라에 가고싶었고 살아보고싶었다 .
처음엔 방학동안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친구와 함께 부산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.
그때 당시 100만원 정도의 돈을 들고 갔으니 내 인생 최대의 첫 소비이자 첫 해외경험 이었다 . ! 그리고 다시 우여곡절끝에 일본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고 일년간의 시간을 보낸후 나는 다시 복학을 했다 .
그리고 나의 직장은 당연히 일본어 관련 회사에 들어가는것이었다 .
그 당시 일본계 회사를 들어가자니 나의 일본어 실력이 부족한듯했고 일본관련 무역회사를 들어가자니 면접을 봤던 곳들이 대부분 영세 기업이었다. 그리고 지방에 살던 내가 경기도로 와서 직장을 다니려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.
그렇게 나의 일본어 관련 직장에 취업하고자 하는 꿈은
이루지 못했다 . 아직 일본에 대한 환상과 미련이 남았던 나는 다시 일본에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가서 일을했다 . 그러고 다시 출국과 귀국을 반복 .
그러다 보니 어느덧 나의 나이 26 .

그때 뭘해야할지 몰라 방황하던 나에게 아르바이트 처럼 생각하고 해보라던 일이 나의 아주 오랫동안 소속된 회사가 될줄 몰랐다 .
지인은 통해 들어가 그리어렵지 않은 업무를 했다 .물로 신분은 파견직 .
그렇게 몇달 일을 했는데 누군가가 나의 지인과 나의 사이를 눈치채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.
지금 생각하면 그게 큰 잘못을 한 일도 아닌데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일을 그만두었고 또다시 다른 보험회사에 들어가 비슷한 업무를 했다 . 정규직도 아니었고 파견직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의 나의 직장은 나를 계속 채찍질 했다 .

" 난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야 .난 더 좋은 곳에서 일할 수 있어 .난 이곳을 벗어나야해 . "

그러던중 다시 정규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알게 되었고 타사 정규직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.
그때 나의 나이 29살 . 회사에 입사하기엔 여자의 나이로서는 좀 너무 늦은건 아닌지 그래서 면접에서 떨어지는건 아닌지 두려웠다 .

면접은 2시간여에 걸쳐 이루어졌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 .
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. 면접을 본 후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.
그래서 떨어졌을거라는 슬픈 감정으로 하루하루 보내던중 합격 안내를 받게 되었다 .!!!
정규직으로 입사하게 된것이다 .
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.
내가 열심히 공부해온 일본어와는 전혀 무관한 업무를 직장에서 하게 된다는 서운함은 있었지만 나는 너무너무 기뻤다 . 그렇게 나는 그회사에 입사해서 15년간을 일하게 된것이다 . 그회사에 다니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들을 키우며 울고 웃으며 보낸 15년의 시간들 . 마지막까지 웃으며 퇴사를 하게 된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았겠지만 마지막 퇴사는 좀 씁쓸했다 . 회사에 대한 자부심은 있었으나 내가 하는 업무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제로였다 . " 아니 내가 고작 이 구질구질 (많이 화가 났을때 ) 한 업무 하려고 아이들도 케어하지도 못하면서 이회사를 다녀야해????"

그렇게 부정적인 감정과 업무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며 꾹꾹 참고 참고 다녔다 .

새벽같이 일어나 다른 지방에 파견을 가는 날이면
가다가 타고 있는 버스가 사고가 나서 경미한 부상이라도 입고 회사를 안나가면 좋겠단 생각도 했다 .

그러던중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왔고
서울에 근무지를 변경하여 계속 근무를 했다 . 항상 비슷한 감정이었다 .
"퇴사를 하고싶다 . !!!!"
정말 격하게 퇴사하고 싶다 . 중간에 육아휴직을 쓰고 아이들을 돌보며
서울투어도 많이 하고 좋은 카페도 많이 다녔다 .
복직하기가 너무너무 싫었지만 남편혼자 경제활동을 하게 하기엔 미안한 마음이 컸다 . 안정적이고 다니면 다닐수록 급여는 높아졌으니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조건의 직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. 그러다 승진이라는것도 해보고 인센티브도 받아보고
사람들이 나를 과장님이라고 불러주는것도 좋았다 . 언니의 추천으로 #레버리지 라는 책을 읽었다 .
정말 퇴사의 욕구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.
그러던중 원거리발령이 났고 왕복 3시간여 소요되는곳에서 몇년을 일하게 되면 나의 아이들을 보살피기는 커녕 나의 가정이 엉망이 될거란 생각이 들었다 . 그리고 이건 해도해도 너무 한단 생각이 들었다 . 회사에 간절히 요청을 했으나 ( 지금당장은 그곳으로의 출근이 힘들고 아이도 아프다 )거절당했고 결국 발령이 나버려서 나는 남편과 함께 노무사를 방문하고 법적 절차를 진행했다 . 나는 잃을것이 없었다 .
나도 지키고 나의 가족도 지킬수 있는 방법이었다 . 그러고 보면 회사는 일방적으로 서울과 지방의 인력 불균형 문제를 지방직원의 서울 발령이라는 강제적인 방법으로 해결했던 때였다 . 다들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을지 나는 이해한다 .
나의 가장 친한 직장 친구또한 그러한 발령으로 지방에서 서울까지 주말마다 오가며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면서 서울에서 근무를 했었기 때문이다 .

그 모든 과정을 이겨낸 친구가 대견하고 멋있었다 . 하지만 나는 회사의 발령을 따를수 없었다 .
그러면서 나는 정신적인 불안과 신체적 이상 증상까지 나타났고 나의 영향으로 아이가 심하게 아팠다 . 회사는 결국 나의 근무지를 서울로 다시 발령을 냈다 . 그리고 나는 병가로 일년을 쉬었다 . 이제 병가가 끝나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 .
너무 억울했다 . 그렇게 퇴사를 해야 한다는것이 .
아마 회사도 병가가 끝나면 내가 퇴사를 할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. 그러나 나는 다시 출근을 했다 .
그리고 새로운 환경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었다 .
근데 하필 그곳에 내가 예전부터 불편해 하던 직원이 같은 팀으로 일하게 된것 아닌가 .!!!!!

그 친구가 불편하기도 했지만 병가기간동안 정신과 약을 먹으며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 (체중이 엄청 불어 내인생 최대의 몸무게로 복직)
여서 부끄럽기도 하고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
그친구에게도 나의 그런 모습을 보이며 함께 일한다는게 나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. 그리고 회사에 큰 이슈가 있었던 직원이라 나스스로 많이 위축되고 그래서 스스로 사람들과 어울리는것을 꺼려했다 .
이렇게 복직을 해서 몇달 생활 하면서 나의 회사생활이 평탄할 수 없다는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. 나를 미워했다 . 자존감이 바닥이었다 . 그러고는 휴가를 얻어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길에 나는 호흡곤란으로 겨우 탑승한 비행기에서 내려야했고 밤새 제주의 어느 호텔방에서 이러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뜬눈으로 하루를 보낸적이있다 . 그러고는 결심했다 .
회사를 쉬기로 ! 그렇게 또다시 나의 휴직이 시작되었고
또 복직을 앞두고 있었다 .

이젠 정말 나도 지치는 상황 . 그간 몇번의 휴직과 몇번의 복직이 있었던가 . !!!
그런데 그때 정말 운이 좋게도 정말 감사하게도
회사와 협상 끝에 희망퇴직을 할수 있었다 .
그렇게 퇴직을 한지 6개월이 지났다 .
이모든 과정이 나에게 당연히 고통이었지만 그 과정속에서 배운것도 참 많다 .
그리고 본의 아니게 내가 다른 직원들에게 끼쳤을 피해 라던지 다른 직원들에게 좀더 다가가려고 노력했더라면 하는 후회는 남는다 . 그리고 그 일들로 인해 나의 건강은 엉망이 되었고
이렇게 건강이 악화되어 만신창이로 만든 회사를 원망하는 마음이 너무컸다 . 조금더 기쁘고 행복하게 축하받으며 퇴사를 하고싶었는데 이렇게 마무리를 한다 . 누구나 시작이 있으면 마지막이 있는법 .
아쉬움도 슬픔도 분함도 억울함도 감사함도 크지만
나는 이제 그 지긋지긋한 회사를 벗어나
하루를 자유롭게 사는 자유인이 되었다 .
그어느때 보다 가장 행복한 인생의 순간을 살고 있다 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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